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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심연 (제임스 펠런, 2013)

9년 전 작성

표지 이미지

각종 대중매체에서 대개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머리가 비상하고 매력적이지만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몰인정한 연쇄살인마로 그려집니다. 간혹 긍정적인 부분인 "머리가 비상하고 매력적인" 요소가 없다 해도 무감각하고 잔인한 면이 남아서 사이코패스를 규정하게 됩니다.

영화 속 사이코패스들

우리 사회에서도 세상을 떠들석하게 하는 범죄자가 잡힐 때마다 신문 기사 말미에는 과연 그 범죄자가 사이코패스인지 여부를 친절히 설명해 줍니다.

이 책은 수십년 뇌의 동작 원리를 연구한 뇌 과학자가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신경학적 특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도 사이코패스 범죄자와 동일한 신경학적 패턴이 있음을 깨닫게 되어 자신을 대상으로 사이코패스에 대해 탐구한 일종의 자서전형 지식 전달서입니다.

TED 영상으로 국내에서도 제법 유명해진 내용을 담아 나온 책이 번역서로 출판된 것인데, 사실 책 자체는 TED 영상처럼 친절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구입하면서 뇌 과학 서적이나 신경해부학 서적을 샀다고 생각하지 않을 일반 독자들에게는, 의학 전공자마저 골치 아파할 용어로 뇌의 기작을 설명하는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부분은 사이코패스적 특성을 갖는 평범(?)한 사람의 간증이기에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우선 책은 _사이코패스_라는 이제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용어가 그리 과학적인 용어는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과학자, 의학자들은 사이코패스라는 특정 부류의 사람이 칼로 두부 자르듯 가려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더구나 요즘 들어 사이코패스와 함께 언급되는 _소시오패스_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얼마나 많은 오해가 있는지 설명합니다 - 심지어 인터넷 상에서는 사이코패스는 선천적, 소시오패스는 후천적 특성이고 어느 쪽이 더 무섭네 어쩌네 떠들어 대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우리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범죄자를 만나면 다름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나와는 다른 사람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사이코패스"라는 딱지를 붙여 분류하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이코패스에 가장 가까운 정신의학적 장애의 이름은 반사회성 인격 장애(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라고 합니다 - 의학에서는 생물학적 원인과 증세, 결과가 분명할 때에만 병(disease)_이라고 부르고, 정신과적 문제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대체로 부족한 탓에 _장애(disorder) 혹은 _증후군(syndrome)_이라는 용어로 구분해 부릅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라 불리는 잔혹한 범죄자들의 뇌 특성을 흔하디 흔한 일반인, 심지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저자도 그런 경우 중 하나인 셈이죠). 또한, (여러 한계에 대한 지적도 있지만) 유일하게 의학계에서 사이코패스 진단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로버트 헤어(Robert Hare)PCL-R(Psychopath Checklist, Revised)을 사용할 때 극소수만이 완벽히 사이코패스로 진단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중에 떠도는 PCL-R 이 아닌 다른 사이코패스 테스트는 다 헛소립니다.)

이런 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바로 대인 공감 능력의 부재입니다. 즉, 타인에게서 사랑받고 타인을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거나 약하다는 점이지요. 이 욕구는 일종의 감정적 유대감이고, 더 친숙하게는 "공감"이라고 부릅니다. 이 시점에 "나에게는 공감 능력이 있으니 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구나"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_공감(empathy)_과 _동정(sympathy)_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우리가 말하는 공감은 감정적 공감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내 것처럼 그대로 느끼는 능력입니다. 반면, 동정은 인지적 공감으로 다른 사람에게 닥친 일을 이해해 그 사람에게 다가올 일을 알고 도와주려는 의지입니다.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은 공감은 못하거나 약하지만 인지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동정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 당신은 다른 이의 고통을 느끼고 있나요, 아니면 알고 있나요? 그리고, 자신이 감정적 공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이코패스의 특성으로 사회적 윤리나 도덕 혹은 규범에 맞춰 스스로를 억제하는 뇌 영역의 활동이 매우 저조하다는 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고나 행동이 충동적이고 쉽게 흥미를 잃거나 법규를 스스럼 없이 어길 수 있고 그러고 나서도 별로 죄책감이나 후회를 느끼지 않습니다. 또한,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주어지는 상황에서도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해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멘탈이 강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사이코패스의 특성이 무조건 사람을 연쇄살인마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 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미국 인구 중 1-2% 정도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기에 비슷한 비율이라면 우리도 100명 정도가 모이면 그 중 최소 한두명은 사이코패스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태생적인 사이코패스적 특성이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 3가지 조건이 사이코패스 살인마를 만들어낸다고 주장(아직 과학적 근거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가설)합니다.

  • 뇌 특정 영역의 기능 저하
  • 공격성과 관련된 변이 유전자의 존재
  • 어린 시절 정신적/육체적/성적 학대

특히, 뇌의 기능 저하(사실상의 장애)와 관련된 부분은 임신 중 혹은 임신 4기라고 불리는 출산 직후 몇 개월간 유아가 각종 학대를 비롯한 스트레스에 노출되는 기간과 관련이 깊다고 합니다. 뇌 특정 부위의 기능 저하나 손상은 나이가 들어 가해질수록 손상되지 않은 다른 부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줄어드는 셈이죠.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공격성과 관련된 변이 유전자는 반성 유전으로 모계 유전입니다. 성 염색체 중에 X-염색체를 통해 유전되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경우 다른 쪽에서 보전받을 수 있는 여성(XX)보다는 발현될 수 밖에 없는 남성(XY)에게서 더 드러나게 됩니다 - 발현될 확률을 30%로만 잡아도 남성은 30% 그대로인 반면, 여성은 9% 로 줄어듭니다. 공격성을 증대시키는 남성 호르몬의 영향과 더불어 이 부분도 남성에게서 보다 더 폭력적인 행동을 관찰할 수 있는 이유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사이코패스적 성향 자체가 피해자를 내려치며 미소 짓는 끔찍한 살인마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잘 키워진 사이코패스가 갖는 특성은 (저자처럼) 인간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공격적인 사이코패스 때문에 우리가 치루어야 하는 비용은 친사회적인 사이코패스가 가져다주는 이득으로 충분히 상쇄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책의 후면 표지에는 일종의 광고성 문구로 _사이코패스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_고 하는데, 책을 읽고 나서 느끼기에 일반인이 사이코패스를 가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사이코패스적 성향의 사람은 가장(pretending)하는데 일가견이 있으며, 남들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릴 때 필요하다면 기꺼이 같이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는 슬퍼서 눈물 흘린다 생각할지 모릅니다. 더구나 훌륭할 정도로 자신이 조종하기 쉬운 목표를 찾아내는 본능이 있어 사이코패스가 다른 사이코패스를 가려내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가려내는 것은 글쎄요... 차라리 친사회적인 사이코패스를 친구로 두는 것이 보다 안전한 방법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매우 고귀하고 고차원적인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구상의 다른 종에 비해 월등히 잘 다듬어진 두뇌를 가지고 있고, 잘 포장된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정신은 물리/전기/화학적 특성 아래 갇혀 있는 육체의 지배 아래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 그렇지 않다면 육체의 지배를 이겨낸 듯한 대상에게 그토록 찬양을 보낼리 없겠지요. 때문에 인간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인간이라는 종의 동물적/생물적 특성의 이해 위에 그려져야 한다는 것이 제 사견이고 때문에 그와 관련된 분야(예를 들면, 진화 심리학)의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번 책은 그런 제가 아닌 집사람이 구입해 온 책이고 책을 들여온 이유는 "남편이라는 사람을 잘 이해하고 싶어서"랍니다. 확실한 사실은 제가 그리 좋은 남편은 아니었나 봅니다. ^^;

밥은 먹고 다니냐